발달장애인과 함께 하는 촬영 현장을 위한 가이드라인 - 첫 발 떼기
가이드라인을 만든 이유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의뢰를 받아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직장 생활에서 스마트폰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습니다.이 과정에서 팀 내부에서 발달장애인 출연자와 어떻게 소통하면 좋을지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질문을 받고 돌아보니 저는 비영리단체, 복지관, 촬영 현장 등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출연자 분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종종 당사자와 소통을 잘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쌓인 노하우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걸 설명하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런 식으로 짧게 답하고 도망(?) 가곤 했습니다.
“가이드라인 같은 것은 없어요. 발달장애인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같이 오랫동안 보내면서 시간을 보내면서 배우는 거고, 실수할까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본적인 배려를 갖추고, 잘 이해했는지 불편했는지 본인에게 물어보며 시행착오를 겪고 배워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언뜻 들으면 그럴듯 하지만, 제가 고민을 얘기한 입장이라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싶어 막막했을 것 같습니다.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잘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제가 겪었던 시행착오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미리 경험한 사람의 몫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촬영 현장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대신 연기하거나 결정하는 일이 줄어들 거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경험이라도 꺼내놓고 함께 발전시키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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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1. 충분한 시간을 확보합니다.

영상 제작은 곧 돈과 시간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제작 일정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출연자와 함께 할 때에는 이 예상과 일정이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소통하는 데에는 제작진의 생각보다 훨씬, 다시 강조하지만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작진이 출연자를 다그치거나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고 서로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 확보’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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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2. 미리 만나서 소통합니다.

사전제작 단계에서 충분한 소통을 합니다. 발달장애인은 정해져 있고 반복되는 일정, 즉 루틴에 익숙합니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공간과 환경, 일정에 좀 더 불안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미리 만나서 제작진이 출연자에게 익숙하고 안전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기 보다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미리 인사를 나눕니다.
또한 촬영 내용과 일정을 쉽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출연자가 소음이나 빛 등에 예민할 수 있으므로,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지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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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3. 가능한 당사자와 소통합니다.

짧은 시간에 서로를 충분히 알기 어렵기에, 부모·활동지원사·근로지원인 같은 조력자의 경험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되도록 당사자와 직접 소통해야 합니다. 부모나 조력자라고 해서 당사자를 모두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제작진과 당사자가 조력자에게만 의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직접 소통하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지 말고, 출연자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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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4. 루틴을 만들고 가능한 지킵니다.

“3시간 촬영을 하고 30분간 쉽니다.”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식사 입니다.”
“촬영시간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입니다.”
등 미리 루틴을 공유하고 현장에서도 가능한 약속을 지킵니다. 정해진 정확한 일정이 있다는 것은 발달장애당사자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장 상황은 늘 완벽하지 않으니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미리 정확하게 소통을 합니다. 또한 집중력이 길지 않은 경우가 많으므로 휴식 시간을 꼭 일정에서 고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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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5. 긴 텍스트보다 짧고 쉬운 글과 그림을 활용합니다.

시나리오나 질문지는 짧고 쉽고 명확하게 작성합니다. 사전에 당사자와 확인하며 어려운 표현이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는지 점검합니다. 특히 글보다는 그림 형태의 스토리보드가 현장에서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데 더 직관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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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6. 돌려 말하지 말고, 정확하되 부드럽고 일관되게 소통합니다.

배려한다는 이유로 말을 돌리면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요구 사항은 짧고 쉬운 말로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빠르고 길게 요구사항을 한꺼번에 말하는 것, 솔직함을 이유로 화를 내거나 거친 표현을 쓰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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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7. 출연자에 맞춰 유연하게 계획을 수정합니다

연출자의 머릿속 그림을 장애당사자에게 맞추려다 보면 분명 잘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생기고 초초해지고 화를 내게 됩니다. 거꾸로 당사자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캐릭터와 상황을 수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대사가 어려우면 몸짓이나 카메라 구도로 표현할 수도 있고 복잡한 컷 쪼개기와 동선을 출연자에게 좀 더 적합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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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8. 선택과 결정의 경험을 계속해서 쌓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자주 “모르겠는데”, “모르겠어요”라고 하는 이유는 실제로 성장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직접 결정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주변에서 결정해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미리 함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준비과정부터 참여하고 의사표현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너무 추상적이고 넓은 범위의 질문은 어려울 수 있으니 A와 B, C 중 어떤 것이 더 좋나요? 아니면 다른 의견이 있나요?와 같이 명확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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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9 . 웃음과 유머는 현장을 좀 더 안전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는 서로 어느 정도 서로를 놀리면서, 함께 웃으면서 친해집니다.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기보다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는 웃음과 유머로 현장이 부드럽게 된다면 당사자에게도 즐거움과 안전함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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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10. 여유를 갖고 질문하며 계속 개선합니다.

원칙은 원칙일 뿐, 현장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습니다. 발달장애인과 함께한다고 해서 특별히 복잡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긴장할수록 상대도 어려워하고 신뢰 쌓기가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도움을 주고 싶거나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출연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됩니다.
“이 부분에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실례가 될까요?”
이처럼 솔직하게 질문하는 과정 자체가 곧 존중의 표현이며 발달장애를 가진 출연자분들도 그 배려와 존중을 반드시 느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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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미디어필링 제작진은 이번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발달장애인 자문위원과 촬영 전 후 자문 모임을 갖고 출연진 분들과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이 가이드라인을 발전시켜 나가려 합니다. 읽고 자신의 경험과 의견도 말씀해주세요.
이 글이 영상 제작 현장에 대한 내용이지만 함께 일과 창작 여가를 함께 하는 모두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